민란의 시대

민란의 시대

  • 자 :이이화
  • 출판사 :한겨레출판
  • 출판년 :2021-08-26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22-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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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나라를 바로잡자!”



홍경래의 난에서 항일 의병 항쟁까지

민중의 시각에서 본 조선의 19세기



‘역사를 가장 쉽게 풀어내는 재야학자’로 꼽히는 이이화의 신간 《민란의 시대》가 출간되었다. ‘조선의 마지막 100년’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19세기 조선의 역사를 민중 봉기를 중심으로 재조명한다. 사회 진보를 가로막는 기득권 세력의 낡은 특권 의식과 그에 맞서 저항하는 민중들의 다양한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는 조선의 19세기를 무법과 혼란으로 얼룩진 과도기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3.1 운동, 4.19 혁명, 6월 민주항쟁 그리고 지금의 촛불 시민혁명으로 이어지는 저항 운동이 태동한 시기로 바라보며 역동적인 민중의 에너지를 조명하는 데 힘쓰고 있다.



적폐 청산은 뒷전이고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한 세력이 정권을 잡다



1800년 개혁 정치를 추구하던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순조가 즉위한다. 정순대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이내 김조순이 권력을 휘어잡아 안동 김씨의 문벌 정치가 시작된다. 이것이 조선의 19세기 첫 페이지다. 온갖 적폐로 민중의 삶이 피폐해져만 가던 때,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세력들이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이들은 영리하게도 집권 후 이반한 민심을 달래고자 전격적으로 공노비 해방을 단행한다. 그렇게 시야를 돌려놓고는 역시나 다른 모든 개혁 정책들을 폐기한다.

그사이 전국에는 조정과 수령을 지탄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익명의 글들이 수없이 나붙는다. 또한 새롭게 정씨 왕조가 일어난다거나 차별 없는 후천개벽의 세상이 도래한다는 이야기도 널리 퍼져나갔다. 크고 작은 봉기 모의가 잇따랐고 민란도 연달아 일어났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홍경래의 난’이라 불리는 관서 농민전쟁이다.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며 문벌 집단의 차별과 부정을 직접 체감한 홍경래가 차별을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던 평안도 지역의 민중들을 규합하여 봉기한 것으로, 조선 후기 최대 규모였다. 결국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이에 자극 받아 크고 작은 봉기들이 계속되었다.



공허한 대책으로 불만은 늘어가고, 관의 권위는 끝없이 추락하다



이 시기 관의 권위, 양반의 권위가 추락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다. 현지에 부임하러 가는 수령을 무리 지어 찾아가 난타한다든지 행차 시에 가마를 부수고 종복을 두들겨 팬 뒤 달아나는 일도 있었고, 양반집에 돌팔매질을 하고 식솔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 명화적이 출몰하여 관가를 습격?약탈했고, 방화 사건이나 무기 절도도 빈발했다. 토지제도와 신분제도의 문란과 모순의 누적으로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독점과 특권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민중의 자각과 분노가 이와 같이 표출되었다.

순조 연간에 토지문제나 신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조사를 벌이고 서얼 차별을 없애는 등의 조처를 했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일부 세력이 관직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조처들은 한낱 공허한 대책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 골골마다 봉기가 일어나다



마침내 쌓이고 쌓인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이전까지의 봉기들이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층이나 중소 상인계층, 도성의 빈민층 중심이었다면, 삼정의 문란이 극심해지면서 조선시대 경제의 근간이었던 농민층까지 저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1862년 초 지리산 밑자락에서 시작된 봉기의 불씨는 경상도에 전라도로, 전라도에서 충청도로 옮겨 붙으며 추수기에 들어서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0월 함경도 함흥, 12월 황해도 황주에서의 봉기 기록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봉기들은 다른 마을과 유기적으로 연계된 것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봉기했다는 소식에 고무되어 자신들도 분노를 표출한 것뿐이었다. 그때마다 삼정 개혁이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나 이름뿐인 삼정이정청의 설치 외에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성장한 민중 의식, 드디어 전국적 저항을 펼치다



삼남의 농민 봉기는 조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해 그 한계가 명확했다. 1894년 동학 농민전쟁은 동학이라는 사상과 교단 조직을 이용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동학교도와 민중이 연합한 결과로, 19세기 민중 역량의 총집결이라고 할 수 있다. 1차 봉기는 신분 해방을 위한 반봉건 운동, 2차 봉기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더욱 커져가는 일본 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침략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그 성격에 주목하여 동학 농민전쟁을 동학 농민혁명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연발식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개입과 대량 학살로 이 혁명은 실패하고 만다.



외세에 꺾인 민중의 저항, 의병으로 이어지다



동학 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해인 1895년부터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질 때까지 민중의 저항은 항일 의병의 형태로 나타났다. 초기의 중심 세력은 전통 유림과 동학 농민 세력 그리고 개화 세력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 사이에는 미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되었다. 전통 유림은 신분제 철폐 등을 외치는 동학 농민 세력과 묵은 봉건 체제를 손보자는 개화 세력을 아군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동학 농민 세력에게 전통 유림은 타도할 지배 세력이었고, 외세와 통하는 개화 세력 역시 믿을 수 없었다. 개화 세력의 입장에서는 기성 질서를 유지하려는 전통 유림과 개화에 반대하는 동학 농민 세력이 모두 넘어야 할 벽이었다. 이런 대립 관계 속에서 의병의 사기는 유지되기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봉건 질서를 고수한 유림 의병장들이 주도권을 잃고 신돌석, 안규홍 등 평민 의병장이 등장하면서 의병 활동은 다시 활기를 띤다. 이들은 애국이나 위민 같은 가치보다는 일본의 이권 침탈과 미곡 유출 등 생존권 문제에 더 민감했고, 이런 구체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춰 더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1908년 13도 연합 부대의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신돌석, 안규홍 등도 살해되고 만다. 1909년에는 이해에만 1만7000여 명의 의병이 살해됐다는 자료가 남아 있다. 그렇게 한일합병의 1910년이 다가왔다.



촛불 시민혁명 앞에서 다시 보는 조선의 마지막 100년



저자의 이름에 걸맞게 쉽고 정갈하게 정리된 내용만큼 독자들을 배려한 구성도 눈에 띤다. 각 부의 끝에는 홍경래 격문이나 전봉준의 포고문 등이 부록으로 실려 있어 당시의 상황을 더욱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또한 책의 마지막에는 1776년 정조 즉위에서부터 1910년 안중근 처형과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연표를 실어 이 시대를 개괄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과 폐단이 드러나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지금, 조선이 몰락하는 마지막 100년과 그 시기 민중들의 외침을 차분히 되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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