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립전쟁사의 재조명

한국 독립전쟁사의 재조명

  • 자 :이덕일
  • 출판사 :만권당
  • 출판년 :2019-02-27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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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다시

한국 독립전쟁사에 주목해야 하는가?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독일, 이탈리아와 달리 일본은 전범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들은 전후 일본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부활했다. 전범들이 형식적 처벌 이후 일본 우익의 주요 축을 형성한 결과, 침략전쟁이 올바른 것이었다는 군국주의 세력의 역사관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형성과 전파에 종사했던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해방 이후에도 한국 사학계를 장악해 일본의 식민사관이 한국사의 주류 이론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지난 세기의 한국 독립전쟁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 이는 단순히 한국 독립전쟁사에 대한 재조명일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는 물론,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의 현 상황에 대한 거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최고의 역사학자인 이덕일의 『한국 독립전쟁사의 재조명』은 일본의 전후 전범 세력이 재등장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현재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동아시아 상황을 재점검하고, 한국 독립전쟁사의 여러 장면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현실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전후 일본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부활한 전범 세력,

그리고 한국 사회의 주류 사학이 된 식민사관



일본에서 전범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극우파가 재부상하게 된 것은 전후 동아시아의 정치 질서가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당초 미국의 전후 동아시아 정책의 주축은 장개석과 중국 국민당의 승리를 기정사실로 삼아서 중국을 동아시아 반소(反蘇)·반공의 보루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공내전이 예상과 달리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중국을 동아시아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는 미국의 계획은 실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동아시아 정책을 바꾸었고, 이에 따라 대일본 정책도 바뀌었다. 미국은 한반도 남쪽에서 친미 반공 정권을 수립시키는 것으로 정책을 수정하고, 중국을 대신할 반공의 보루로 일본을 선택했고, 그렇게 일본 전범 세력은 전후 부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중 특히 큰 역할을 한 인물로 기시 노부스케와 쇼리키 마쓰타로를 들 수 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도조 히데키 등의 처형 다음 날인 1948년 12월 24일 석방되면서 공직에서 추방되었는데, 이후 일본재건연맹을 설립해 회장으로 취임했고, 일본민주당 간사장, 내각 총리대신, 자민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1960년 내각 총리대신을 사퇴한 후에도 막후에서 일본 정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한일 국교 정상화에도 가세했다. 쇼리키 마쓰타로는 도쿄제대 법대를 나와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한 후 경시청 경무부 형사과장 등 경찰 요직을 거쳤다. 그의 행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1923년 9월의 관동대지진 때였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을 경찰 조직을 통해 조직적으로 유포해 조선인 대학살을 불러온 인물이 쇼리키였다. 그는 민중들의 분노를 조선인들에게 돌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 내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 무차별적 테러를 가했다.

이들을 비롯해 전후 철저하게 청산되었어야 할 군국주의 세력이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일본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나라가 되었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한국 재점령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일본이 과거의 침략사를 거듭 부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의 역사 도발이 지속적·반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일본 극우파들은 자신들의 과거 침략 행위에 대한 반성의 마음이 없다. 전범 출신들은 사사카와 재단 같은 극우 재단을 만들어 ‘남경 대학살은 없었다’, ‘종군위안부는 자발적이었다’, ‘독도는 일본 땅이다’ 같은 망언들을 학술의 이름으로 조직적으로 유포했다. 그리고 한국인 학자들과 대학원생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막대한 자금으로 친일 한국인 역사학자군(群)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가야는 임나다’, ‘나주 반남 고분군은 5세기경 일본인들이 건너와서 만든 것이다’ 따위의 일제 패망과 함께 폐기되었던 제국주의 역사학이 한국 학계에 다시 등장한 배경이 일본 극우파들의 이런 의도적 행위의 결과임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이제 한국 사회는 한 세기 전처럼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하는 일본 우익들을 다시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더 근본적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었다. 남한은 일본과 중국의 역사 침략에 가장 강하게 저항해야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형성과 전파에 종사했던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해방 이후에도 한국 사학계를 장악했고, 그 결과 일제 황국사관이 해방 이후에도 한국사의 주류 이론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전 생애를 걸고 독립운동에 나선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그들의 투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 독립전쟁사의 재조명』에서는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독립운동가들과 한국 독립전쟁사에 큰 의미를 갖는 몇몇 장면들을 소개한다.

먼저 명망가 집안에서 태어나 개인의 자유와 개인 사이의 절대적 평등을 주창하는 아나키스트가 된 우당 이회영, 그리고 양명학의 토대 위에서 서양 정치사상을 받아들이고 군주제 대신 공화제를 주창한 석주 이상룡을 통해 아나키즘 독립전쟁사를 고찰한다.

평생 동지였던 이상설의 사상과 만주 망명 후 횡도촌에 집결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이회영의 아나키즘 수용 이전의 사상을 추적하는데, 그 과정에서 양명학과 아나키즘의 유사성도 살펴본다. 또한 정통 유학의 학통을 이었음에도, 성리학을 추종하던 당시의 유학자들이나 대한제국의 부활을 주장하던 복벽주의자들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군주제를 전면 부인하고 공화제를 주창했던 이상룡의 사상 형성 과정도 살펴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공화제를 주창한 것에는 이상룡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의 사상에는 만민 평등을 주장하는 평등주의와 자치주의의 요소가 많이 드러나 있다. 그가 비록 아나키즘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의 사상이나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이끌 당시, 그리고 서간도에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실천에 옮겼던 사상과 조직했던 단체들에는 아나키즘적 요소가 적지 않다.

또한 계속되는 외세 의존과 편의주의적 정치 행태로 망국 군주로 남은 고종, 그리고 그를 망명시킴으로써 한국 독립의 물꼬를 터보려 했던 ‘고종 망명 계획’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우당 이회영이 고종을 망명시키려 했다는 사실은 이제 많이 알려져 있다. 고종 망명 계획에 가담했던 인사들은 기독교, 천도교, 유림, 불교계가 모두 망라되었고, 이후 이들 중 일부는 조선의 청년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한 축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고종 망명 계획에 가담했던 인물들의 면면과 노선이 이후 한국 독립운동의 노선이 되는 셈이다.

여러 민족종교와 민족주의, 사회주의자를 망라했던 이들이 고종 망명 계획에 뜻을 같이했던 것은 고종의 정치 행위를 높게 평가해서가 아니었다. 고종의 정치 행태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모순된 것이었다. 개화를 추진한다면서 친청 수구파를 중용하고, 자주국을 수립한다면서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는 고종의 모순된 정치 행태에 대한 실망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상반된 두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고종의 정치 행태는 현실 정치에서 성공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고종이 서세동점과 일본의 굴기 및 한국 점령 야욕으로 대표되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일왕 메이지가 그런 것처럼 입헌군주제를 실시해 시대적 변화에 동참하고, 국내의 개혁적 인재들을 대거 등용해 난국을 타개하는 것뿐이었지만, 고종은 그러지 못했다.

이회영의 다음 발언이 고종 망명 계획의 핵심을 잘 말해준다.



또 일부 사람들의 말과 같이 내가 존왕파였다면 물론 180도의 사상 전환이라 하겠지만, 과거 한말 당시로부터 기미(己未: 3·1 운동) 직전까지 내가 고종을 앞세우려고 한 것은 복벽적 봉건사상에서가 아니라 한국 독립을 촉성시키려면 그 문제를 세계적인 정치 문제로 제기하여야 하겠는데 그러자면 누구보다도 대내외적으로 영향력을 크게 미칠 수 있는 고종을 내세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데서 취해진 하나의 방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동단의 전협 씨가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모셔 가려던 생각과 다를 것이 없다.



이처럼 한국 독립전쟁을 전 세계적인 이슈로 만들기 위해 고종 망명 계획을 수립했지만, 미리 정보를 입수한 일제 당국과 친일 매국노들에 의해 고종이 독살당함으로써 이 계획은 미수에 그치게 된다.



한국 독립전쟁사를 통해 전망해보는 우리의 미래



현재 동아시아 평화는 큰 위협에 처해 있다. 일본은 제국주의 시절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추종하는 극우파 역사관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고, 중국은 과거 자신들을 침략했던 논리였던 일제 식민사관을 거꾸로 역사 침략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1960년대 초반 중국 수상 주은래(周恩來)가 북한의 학술대표단 앞에서 “요동은 조선 민족의 강역”이었다고 말한 것과는 아주 다른 패권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시 위협받는 동아시아의 평화 체제를 되살리는 길은 안중근, 이회영, 신채호의 사상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안중근, 이회영, 신채호는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에 대한 확고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자신들이 한국, 중국 등을 강점한 후 서양에 맞서는 것을 동양 평화라고 주장했지만, 안중근, 이회영, 신채호는 모든 민족이 독립된 상태에서 주권을 가지고 서로 평등하게 지내는 것이 동양 평화라고 생각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무력으로 억압한 상태에서는 평화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일제의 주장은 궤변에 불과하다. 세 선열은 모든 개인, 국가, 민족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지내는 것이 진정한 평화 상태라는 평화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이런 사상적 기반 위에서 동아시아 평화 체제를 구축해야 할 때다.

일본 극우파의 재등장을 보는 심사는 착잡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압도적 무력과 식민사관이라는 두 무기를 들고 과거 한국을 점령했던 그림자가 언뜻언뜻 내비친다. 그래서 이 거대한 무력과 식민사관에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을 되새기는 것은 의미가 있다. 아울러 왜 조선은 멸망했는지에 대한 성찰도 함께 할 때 역사는 여전히 한 개인 및 한 사회를 각성시키는 효용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속으로 /

모든 현상은 음과 양이 있듯이 침략과 저항으로 점철되었던 지난 20세기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로 변질된 일본이 대만과 한국 강점을 필두로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끼쳤던 해악은 경우에 따라서는 역사의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미국이 당초의 전후 아시아 재편 구상처럼 일본을 철저하게 민주적으로 개편했다면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동아시아 세계에서 살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의 공산당이 장개석의 국민당을 꺾고 승리하면서 미국은 당초의 구상을 포기했다. 즉 전범의 철저한 배제를 통한 일본 사회의 민주적 대개조라는 정책 목표를 수정해 전범 출신들이 다시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허용하면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부활을 허용했다. 이로써 전범 세력들이 다시 일본 사회의 중추로 등장했고, 이는 동아시아 사회가 화해와 협력을 통해 지역 공동체로 나아가는 데 큰 장애 요소가 되었다. - 서문 중에서



이들이 전 생애를 걸고 독립전쟁에 나서게 된 사상적 배경이 있었다. 우선 이들이 지향한 정치사상은 공화주의였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공화주의가 망명 후에 형성된 사상이 아니라 망명 전 대한제국 시절 이미 갖고 있던 사상이라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공화주의 사상이 서구 정치사상의 유입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동양의 전통 사상과 서구 정치사상의 접맥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상설, 이상룡, 이회영 등의 주요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주자학이 아니라 양명학을 받아들였다. 양명학의 사해동포주의 사상에서 공화주의의 근거를 찾았고, 이런 사상으로 경학사, 부민단 등을 운영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채택했던 것은 이런 사상이 결실은 맺은 것이었다. 또한 삼한갑족 출신의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로 서구 사상의 일방적 유입이 아니라 양명학에 그 토대를 둔 것이었다. - 서문 중에서



쓰다 소키치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임나일본부를 살리기 위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 전부를 허구로 모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창작해냈다. 이 허구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현재까지도 남한 강단사학계의 정설로 행세하고 있는 것은 세계 사학사(史學史)상의 미스터리다. 프랑스를 비롯해 나치나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지배를 받은 국가들이 아직껏 나치나 파시스트당의 역사관을 하나뿐인 정설로 떠받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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