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외로 읽는 한국 현대사

호외로 읽는 한국 현대사

  • 자 :정운현
  • 출판사 :인문서원
  • 출판년 :2018-11-23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9-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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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사’는 우리 역사의 ‘사건사’

한국 현대사의 격동의 순간들을 다시 읽는다!



실시간으로 뉴스를 접할 수 없었던 과거에는 대형 사건이 터지면 호외를 발행해 급한 소식을 전했다. 호외를 뿌리던 신문 배달 소년들의 모습과 한 장씩 뿌려진 호외를 집어 들고 ‘오늘 또 무슨 큰일이 터졌구나!’ 하고 놀라던 시민들의 모습은 이제 옛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종종 호외가 발행되곤 한다. 호외는 중요한 사건을 좀 더 빨리 보도한다는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다. 호외는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대사건들을 가장 먼저 기록한 것으로, 호외의 역사는 지난 역사 속 대사건들의 색인과 마찬가지다. 일제 치하에서는 나라 잃은 설움과 저항의 역사를, 해방 후 지난 70년간은 정치·사회적 격동기의 굵직한 사건들을 기록해온 것이 바로 호외다. 따라서 이를 정리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되짚어보고 고찰하는 의미 있는 한 걸음이 될 것이다.

『호외로 읽는 한국 현대사』는 150년의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한 호외를 통해 우리 역사의 격동의 순간들을 다시 읽는 책이다. 저자는 그간 수집한 호외를 토대로 1997년에 『호외, 백 년의 기억들』이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이후 20여 년의 세월 동안 새로 발행된 호외들을 추가해 개정 출간한 것이 『호외로 읽는 한국 현대사』다.





강화도 조약부터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까지,

한국 호외의 역사를 돌아보다!



이 땅에서 발행된 최초의 호외는 1894년 당시 인천에서 발행되던 일본계 신문 「조선신보」가 청일전쟁이 임박해서 발행한 호외다. 한글로 된 호외가 발행된 것은 이보다 3년 뒤의 일이다. 1897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창간한 「그리스도신문」은 그해 8월 22일 고종 황제의 탄신일을 맞아 고종 황제의 사진을 석판으로 인쇄해 호외로 배포했다. 이 호외는 속보성 호외라기보다는 부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위의 두 호외는 나름대로 의의는 있지만 명실상부한 이 땅의 첫 호외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 신문계의 첫 호외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1898년 2월 19일 「독립신문」이 발행한 호외다. 그 이유는 이 신문이 한국인에 의해 발행되었고, 취급한 기사가 전형적인 속보성 기사라는 점 때문이다. 이날 이 신문은 미국 군함 메인호가 하바나항에서 폭침된 사실을 속보로 전달하기 위해 호외를 발행했다.

호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속보성 기사를 다룬 전형적인 호외로, 크기가 본판보다 작은 경우가 대부분이며, 편집 역시 본판의 기본 형식을 따르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이에 반해 크기가 본판과 같고 편집 형태 역시 제대로 갖추고 있으면서 호수(號數) 없이 발행된 호외도 상당수 있다. 바로 이것이 일제의 언론 탄압의 한 사례다.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는 이미 호수가 매겨져 발행된 신문이라도 검열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되면 압수하거나 배포를 금지했다. 이런 경우 신문사는 문제가 된 기사를 빼고 다시 신문을 발행했다. 이때 하루에 호수를 두 번 부여할 수는 없으므로 결국 호외의 형태로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같은 형태의 호외는 항일 민족지에서만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3·1 운동을 전후해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인 항일 지하신문의 호외는 1920년 조선총독부가 민간 상업지를 허가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이들 항일 지하신문을 색출·압수하는 데 지친 일제가 결국 이들을 제도권 내로 끌어들이면서 조선 민중에게 언로를 열어주는 듯한 효과를 내기 위해 민간 상업지를 허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민간 상업지 등장 이후,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호외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면서 호외 발행이 정착되기 시작한다.

해방과 함께 시작된 미군정, 좌우 대립 등 정치 격변기를 거치면서 크고 작은 정치 사건들이 많았지만, 이 기간에 발행된 호외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해방 직후 창간된 좌익 신문들의 호외 발행이 두드러졌다. 한국 신문계에서 호외가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들어서부터다. 너무 많은 호외가 발행되자 한국 신문협회가 자율적으로 호외 발행을 자제할 정도였다. 1970년대에는 ‘올림픽 호외’도 등장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호외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호외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속보 매체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한 상태다

지난 역사 속에서 호외는 사건과 함께 성장해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 사회에서 호외는 서서히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해가면서 발행 자체도 현저히 줄었다. 하지만 호외가 사라진다고 해서 사건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호외보다 속보 기능이 우수한 새로운 매체들이 이를 대신할 뿐이다.





『호외로 읽는 한국 현대사』가 전하는

생생한 호외 이야기들



호외는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자 역사의 생생한 기록이다. 우리가 걸어온 150년의 역사가 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호외로 읽는 한국 현대사』는 150년의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한 다양한 호외들을 통해 우리 민족이 겪은 기쁨과 애환, 전율과 흥분의 순간들을 살펴본다.

강화도 조약, 을사늑약 등을 통해 일제하 치욕의 역사를 보여주기도 하고, 민족의 자긍심을 높인 안중근·나석주·윤봉길 의사의 의거 소식을 전하기도 했으며, 4·19 혁명, 6·29 선언 등 민주 사회를 위한 시민들의 열망과 함께하고,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서해페리호 침몰 등 온 국민을 눈물짓게 한 아픔을 전하기도 했던 호외. 최근 들어 가장 큰 이슈인 박근혜 탄핵,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등에 이르기까지 호외는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전하는 매체로서 충실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호외에 관한 꼼꼼한 기록과 해설, 호외 발행 당시의 사진들, 호외 발행에 얽힌 이면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호외로 읽는 한국 현대사』는 호외를 주워 들던 그때의 전율과 흥분, 기대와 두려움과 함께 150년의 한국 역사를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줄 것이다.





본문 속으로 /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신문 「한성순보」가 창간(1883. 10. 31.)된 지 벌써 130년이 지났다. 신문의 역사에서 보면 그리 긴 세월은 아니지만, 그동안 우리는 서구 국가들로 치면 수 세기에 맞먹을 정도의 파란만장한 역사적 사건들을 경험했고, 그때마다 우리 신문들은 이를 호외로 기록해왔다. 따라서 한국 신문의 ‘호외사’는 한국 언론사의 한 영역이기 이전에 한국 근대사의 ‘사건사’라고 볼 수 있다. 호외의 역사는 지난 역사 속 대사건들의 색인이나 마찬가지다. 일제 치하에서는 나라 잃은 설움과 저항의 역사를, 해방 후 지난 70년간은 정치·사회적 격동기의 굵직한 사건들을 기록해온 것이 바로 신문 호외다. - ‘짧게 읽는 호외사’ 중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이때가 두 신문이 친일 대열에 들어선 시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중일전쟁은 명백한 일본의 침략 행위인데도 두 신문은 비판은커녕 “동포여, 자중하라.”고만 외쳤다. 그러나 7월 13일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이 시국담화문을 발표해 조선인들의 협력을 요청한 후 양 사는 적극적으로 이를 기사에 반영했다. 「조선일보」는 7월 19일부터 아군(我軍), 황군(皇軍) 등의 용어를 사용하더니, 다음 날인 20일자 제2호외에서 ‘아(我) 포병 공격 개시’로 제목을 달았고, 「동아일보」 역시 같은 날 「조선일보」와 같은 제목의 호외를 발행했다. 두 신문은 8월 들어서부터는 노골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총후(銃後)의 임무’(8. 2.), 「동아일보」는 ‘거국일치의 요(要)’(8. 20.) 등의 제목으로 사설을 실었으며, 이어서 국방헌금 모금 사고(社告)를 앞 다투어 게재했다. - ‘짧게 읽는 호외사’ 중에서



김일성 사망은 매우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세계적인 뉴스로 취급된 「조선일보」 호외는 첫 보도 이후 48시간 만에 김일성이 생존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세계적인 오보로 기록되고 말았다. 국내외 언론은 물론 일반 국민들마저 술렁거리게 했던 ‘김일성 사망’ 호외는 결국 웃음거리로 끝나고 말았다.

김일성 사망 소식의 발단은 11월 15일 일본 공안조사청이 김일성이 암살되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소식이 일본 증권가와 외교가에 전해져 관심을 끌던 중 16일 「조선일보」가 ‘김일성 피격 사망’ 소식을 도쿄발로 보도했다. 그러자 다음 날인 17일 오전부터 국내 언론들이 이를 앞 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다. 석간신문들은 일제히 1면 머리기사로 다루었고, 조간신문들은 정규 간행을 기다리다 못해 호외를 발행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앞서 16일자로 보도한 자사의 ‘김일성 사망’ 보도가 세계적인 특종이라고 자랑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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