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자를 쓴 여자

벨자를 쓴 여자

  • 자 :장병주
  • 출판사 :지식과감성#
  • 출판년 :2017-11-01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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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조차도 구속으로 느끼고 포기해버리는 여자.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억압을 느끼지 않고

죽음에서 조차 진심으로 자유롭고 싶어 하는 여자의 이야기.



『벨자를 쓴 여자』는 장병주 작가의 금지된 사랑(Unfaithful)에 대한 도덕적 논쟁과 인간 본성에 대해 질문하는 소설이다. 마치 〈죄와 벌〉처럼 죄악과 속죄희구라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계속 솟아나는 꿈과 그런 꿈을 억누르는 벨자의 상징을 통해 한 인간의 열정과 생존이 참담하게 비극화되어가는 과정을 ‘피아노 치는 남자’와 ‘바이올린 켜는 여자’, 두 사람의 삶을 씨줄과 날줄처럼 교직으로 배치하고 절대로 이루어질 수도, 그렇다고 헤어질 수도 없는 관계고리로 그려나간 한편의 불협화 협주곡이다.





자유를 위한 혼의 비행



1. 비극의 문

금지된 사랑(Unfaithful)에 대한 도덕적 논쟁과 인간 본성에 대해 질문하는 소설 “벨자를 쓴 여자”는 마치 〈죄와 벌〉처럼 죄악과 속죄희구라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계속 솟아나는 꿈과 그런 꿈을 억누르는 벨자의 상징을 통해 한 인간의 열정과 생존이 참담하게 비극화되어가는 과정을 ‘피아노 치는 남자’와 ‘바이올린 켜는 여자’, 두 사람의 삶을 씨줄과 날줄처럼 교직으로 배치하고 절대로 이루어질 수도, 그렇다고 헤어질 수도 없는 관계고리로 그려나간 한편의 불협화 협주곡이다.



주인공 지후와 진희 그리고 그 사이에 방관자처럼 서 있는 성준 등 세 사람. 비극의 종장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삶에는 금지판도, 이정표도 없다. 문학작품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부정(Unfaithful)이라는 소재는 흔하디흔한 소재로써 식상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가장 위험한 주제이기도 하다. 또한, 작가라면 한 번쯤 다루고 싶은 마약과도 같은 유혹적 테마이다. 작가는 그런 상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비아 플라스의 “벨자”의 신경쇠약증 즉 신드롬을 차용함으로써 부조리한 사회체제 내에서 한 여자가 자아성취를 이뤄가는 과정의 어려움과 빠지기 쉬운 희로애락의 함정을 여러 상징물을 통해 묘파하고 있다.



“사랑하는 한, 사랑은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지후의 태도와 현 가족 체제 내에서 기혼자의 사랑은 죄악일 수밖에 없다는 진희의 태도는 그래서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충돌하지만 화해를 꿈꾸고, 화해하기에는 근본적으로 잘못 지어진 옷같이 따로 노는 것 같은 세 사람. 소설은 바로 그러한 모순과 부조리한 상황에서 자유를 향한 날갯짓을 하고 있다.



2. 꿈, 이카로스의 날개

그녀는 매일 꿈을 꾼다. 마치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소멸되더라도 멈추지 않는.

그녀는 항시 그 꿈을 소망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소멸되고야 말 꿈일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환상처럼 꿈마다 나타나는 가시들, 그렇게 온몸에 가시가 돋아나는 고통으로 괴로워한다. 이는 현실의 삶과는 상충되는 무의식이라는 프로이트적 죄의식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그녀는 죄의식의 가시에 찔리고, 견고한 공간에 갇힌 벨자 속의 존재처럼 끊임없이 괴로워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정신의 곳간 속에 숨어있는 ‘리비도’를 통해 인간본성의 성 에너지를 이해하려 했다. 그것이 인간이 저지른 과오의 면죄부가 되지 못함에도, 잘못된 결과를 해석하는 처방전처럼 사용되곤 했다. 특히 예술 장르에서는 오랜 세월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성 본능적 리비도의 노출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판단은 그런 의미에서 유보하기로 한다. 예술이 종교는 아니므로, 그리고 리비도의 본래 성질은 사용자의 억제력에 비례하므로.

이처럼 리비도는 때로 곱게 다스려지기도 하고 사납게 분출되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의 요구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보편타당적 창조관에 의해 세상에 나타난 성 에너지로써 그 존재의미를 갖는다 할까.

이 소설의 도입은 바로 리비도의 불꽃처럼 선연하게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것도 ‘로맨스’라는 활옷을 걸치고 화려하게 웃으면서. 불륜이지만 불륜으로 느껴지지 않는 인물들의 사랑은 불쏘시개처럼 스토리에 불을 지른다.

그러나 꿈의 연상은 가시처럼 점점 자라나고 옭아매려 한다. 자유로움을 향한 이카로스의 날개조차도 가시에 얽히고 잘리어 날 수가 없는 것이다.

“가시덩굴에 휘말리며, 그 가시덩굴이 아닌 그녀의 몸에서 가시가 돋아나는 꿈을. 자신의 살갗을 뚫고 피를 흘리는. 그 살갗에서 꿈틀꿈틀 가시가 솟아나는 꿈을. 그리고 가시가 돋아날 때마다 느껴지는 그 극심한 통증을.” (p.42) 느끼고 있던 그때, 운명처럼 지후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찬란한 부정의 현실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도대체 이것들이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자신의 심장에서 가시가 되어 자라나는 것일까.”(p.126) 하고 읊조리는 진희는 그 가시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열정, 즉 자신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예감 속에 괴로워한다. 그럴 때마다 진희는 “그래 숨을 참자”고 이를 앙다문다. “숨을 참으면 통증은 사라진다. 오직 숨 쉬려고 할 때만 가시는 살갗을 뚫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숨을 참으면 사그라지지만 숨을 쉬면 다시 자라나는 가시의 통증, 그녀는 그것이 생존의 열정을 상징하는 억제와 발현이라는 이중적 의미의 가시라고 표현한다. 그처럼 가시의 고통은 고스란히 전편에 숨어든 채 자유혼의 비행을 방해하는 것이다.



3. 죄의식과 속죄희구의 충돌

가부장제 사고를 가진 남편 성준은 가족공동체의 일원으로써만 진희의 존재를 인정한다. 자식과 남편이라는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여성이므로 사랑, 자유의지, 꿈같은 것은 가부장 체제의 이념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직업도 인정하지 않는다. 어머니나 아내의 삶에 의해 여성의 운명은 선택되어지는 것이다. 그녀가 꿈꾸는 음악인의 삶도 헛된 정신적 사치라고 폄하한다. 그래서 몰래 시작한 바이올린 연습을 알게 된 성준은 불같이 화를 내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보기 좋게 파괴한다.

부서진 바이올린을 내려다보는 진희는 자신에게 가해진 폭행처럼 아파한다. 그녀의 비극은 바로 그때부터 고조되기 시작한다. 부서진 바이올린을 바라보는 진희는 정신적 내상에 시달리며 더욱 지후를 사랑하게 되고 해방의 출구로 삼게 된다.

여기에서 지후의 피아노와 진희의 바이올린은 자유와 꿈의 실현인 동시에 내상으로 입은 상처의 치유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두 사람이 협주하는 음악은 음악으로써의 기능만이 아니라 치유의 기능까지도 갖고 있으며 동시에 참따란 사랑의 이중주가 되는 셈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히는 병균이 출몰하는데 그것이 바로 작가가 주제로 삼고 있는 벨자의 고통이다. 작은 유리 공간 속에 갇힌 자아의 환각을 보면서 그것이 가정이라는 공간 속에 갇힌 자신의 운명임을 깨닫는다. 말하자면 그것은 절대로 벗어지지도, 벗겨낼 수도 없는 고통의 굴레인 동시에 그곳에서 벗어나려 선택한 지후와의 사랑마저도 죄악이라는 정신적 벨자 신드롬에 시달리게 된다.



죄의식의 고통은 벨자처럼 그녀를 짓눌러대고 지후와의 사랑이 계속되면 될수록 죄의식은 점점 자라나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느낀다. 그것은 산굼부리 분화구를 보면서 느꼈던 폭발과 억제의 이중적 이미지와 비슷하다. 열정이라는 폭발성을 지닌 분화구는 그녀의 내면에서 계속 끓어오르지만 그럴수록 죄의식과 형벌에 대한 불안감 또한 커져간다. 사랑의 해방구로써 찾아간 그곳마저도 온전한 피난처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집과 가까운 곳에서 지후와 함께 한다면 그 두 사람 모두에게 옳지 않다”는, 아니면 “성준에 대한 죄의식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어.”(p.60)

콘서트 일정으로 제주에 내려간 지후를 찾아간 그녀. 집과 먼 곳에서 만나면 그 죄책감이 덜 할지 모른다는 생각과 달리 두 사람이 함께 올라가 본 산굼부리 분화구 위에서 “지금 저 분화구는 그 폭발력을 어떻게 억제하고 있을까. 그러니까 저렇게 많은 식물을 피워낼 수 있겠지만, 만약 억제하지 못하고 폭발해 버린다면 저 아름다운 것들이 모두 폐허가 되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겠지?”(p.62) 하고 읊조린다. 건조한 모래는 손아귀에 가둬도 후르르 빠져나가듯 삭막한 가정, 성준의 메마른 손길은 그래서 더 진희를 못 견디게 한다. 가족은 존재하지만 사랑은 사라져버린 공간 속에서 그녀는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열정의 폭발에 길들어 가면 갈수록 가시에 찔리는 고통은 점점 더 그녀를 괴롭혀댄다. “그러나 열망이 커져 폭발하면 그녀가 소중하게 품어왔던 과거는 참담하게 파괴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진실로 살아 있다는 이 느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녀의 살갗을 뚫고 피를 흘리며 뻗어 나오곤 하던 이 가시들은 과연 어떻게 잠재울 수 있을 것”(p.65)이냐는 환희와 고통 속에서 죄의식은 깊어만 간다.



아이가 아픈 것도 자신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아들이 아픈 것도, 약을 사다 주지 않은 것도 모두 그녀의 잘못처럼 안절부절” 못하다 결국 화장실 문을 잠근 채 “이 가증스러움, 견딜 수가 없다. 마치 한 마리 추하고 역겨운 벌레가 되어 버린 듯한 느낌”(p. 67)으로 토악질을 시작해댄다.

죄책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심장이 멎어 쓰러지는가 하면 요리하다 묻은 카레 자국을 형벌의 자국으로 느끼며 “지워도 지워도 그 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죄의식으로 괴로워한다.

그러한 죄의식은 푸른 장미를 선물 받는 대목에 이르러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사랑의 비극을 상징하는 푸른 장미를 통해 자신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녀의 죄의식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폴로와 히야킨토스의 비극적 결말을 인용하여 차라리 죽은 뒤에는 하얀 히야신스로 태어나기를 꿈꾸기도 한다.



한 번 꿀맛을 맛본 벌, 나비가 새로운 꽃을 보면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들 듯 두 사람의 열정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계속 진행되지만 끝내 성준의 교묘한 작전에 의해 파멸 직전으로 몰리게 되고 결국 진희는 죄에 대한 형벌을 선택하기 위해 이혼 또는 무의식적으로 파멸이라는 비극화를 꾀하게 된다. 그것은 우연한 사고였지만 무의식 세계의 그녀가 원했던 사고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녀 나름의 속죄의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교통사고는 계획된 것처럼 일어난다. 작가는 그것을 통해 인간의 자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순수 인간의지요, 희망인 동시에 가시 같은 형벌이라 생각한 것 같다. 이를테면 형벌을 선택함으로써 자유롭고 싶어 하는 대속의 방식처럼. 이러한 반어적, 반이성적 행동은 죄와 벌의 관계성에 대한 작가 나름의 완성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4. 사랑의 대속적 세리머니는 가능한가?

사랑의 제단에는 열정이라는 연료와 제의에 바칠 희생제물이 공존한다. 누군가는 희생제물이 되어 제단 위에서 불태워 번제로 바쳐져야만 한다. 작가는 바로 이 부분에 이르러 여성의 열정과 여성해방이라는 주제를 다시 일깨우며 사회체제, 윤리사회가 요구하는 책임성을 통렬하게 끄집어낸다.

사랑의 열정에 대한 원망과 배반감 앞에서(p.84) 고뇌하고 갈등하던 그녀는 도망칠 수 없는 공간에서 눈을 뜬다. “지금 진희는 자신이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을 것”(p.87)이라고 느끼는 지후는 가만히 그녀에게 속삭인다. “이 여자는 또 도망가려 하는구나.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으니 그녀의 몸이 그녀를 보호하려 하는구나.”(p.87) 그러면서 지후는 진희의 고통을 벗어주자 결심한다. 형벌에 대한 대속의지를 실현시켜 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의 포장지에 담아두었던 자유, 사랑, 꿈 의지 등을 수레에 싣고 출구를 찾아보려 차를 달린다. 그러나 자동차 사고로 추락, 사경을 헤매다 겨우 되살아난다. 그리고 살아난 삶의 현장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격렬한 고통을 맛본다. 차라리 죽음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가 정리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무한히 자유롭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사고는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제단에 바쳐져야 할 제물이 자신이기를 바라는 자기부정의 의미일 것이다.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용서 대신 이혼 결정을 하는 성준에게 도리어 감사해 하고 형벌을 확인하는 그녀의 심경이야말로 이를 잘 뒷받침하고 있다.



작가는 이후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이별의 별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사랑의 기억은 환희인 동시에 아픔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다른 한 사람에겐 상처가 될 수밖에 없는 상대적 가해성. 그녀가 꾼 꿈이 제아무리 고귀하고 값진 것이라 하더라도 희망 그 뒤편에는 슬픔과 배반감과 절망이 존재하므로 사랑하는 대상조차 대립적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진희는 그러한 꿈, 희망, 환희를 바이올린에 담아 연주하고 있지만 비극의 기억은 바로 오랫동안 미뤄왔던 숙제처럼 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억의 강(15장)은 바로 두 사람의 이별, 서로를 보내는 송별사로 가득 차 있다. 한때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책임과 의무감을 떠안게 된 지후를 보며 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불편함에 그녀는 이별을 결심하게 된다. 일종의 정신적 정화를 위한 대속제의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진희는 남편 성준과의 재회를 꿈꾸거나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성준은 사랑의 배신을 바이올린 파괴(p.99)라는 방식으로 이미 복수를 했고 이혼 후 두 아들을 데리고 먼 나라로 떠났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조차 없는 상태다.



결국, 길고 험했던 삶의 종장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고백한다. “자유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본질이며, 가장 사랑하는 사람조차 버려야만 얻는 세계이며, 상대를 부정하고 초월할 때만이 잘못 맺어진 두 사람의 불완전한 사랑이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 진희는 사랑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지후를 쫓은 것이 아니라 인생의 꿈이라는 명제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랑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구속이라고 여기는 그녀는 지후를 자유롭게 놓아줌으로써 온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가정체제가 제시하는 “행복론”의 막연성, 모호성을 비판하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이고 보편적인 윤리, 도덕에 의해 선택한 행복론이 진정한 해법인가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묻는 것으로 이 작품은 끝을 맺고 있다 할 것이다.

실로 수 천 년 동안 가정이라는 미명하에 지탱해 온 사랑의 윤리. 도덕적 가치가 인간 자유의지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솔직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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