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하는 순간

소멸하는 순간

  • 자 :박유하
  • 출판사 :황소자리
  • 출판년 :2017-08-11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7-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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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나날이 소멸해가는 것을 우리는 본다. 그것은 더욱 소중한 것이 익어감을 보기 위함이니 마치 뜰에 기르는 진귀한 식물, 가르치는 어린아이, 쓰고 있는 조그마한 책처럼.’

헤르만 헤세의 글이다.

시간의 소멸을 목격한 것이 어디 헤세뿐이겠는가. 시간성이란 유사 이래로 철학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예술가들이 천착해온 주제였고, 어찌해볼 도리 없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 앞에 무릎 꿇고 좌절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 소설 《소멸하는 순간》은 시간의 유한성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탐색한, 근래 만나기 힘든 철학적 관념소설이다.

2백자 원고지 1,500매가 넘는 소설에서 작가는 지리멸렬한‘지금, 이곳’의 일상 속을 부유하는 한 여성의 삶을 통해 유사 이래 계속되어온 ‘시간’의 불가해한 속성과 그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고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슬픔, 생의 의미 등을 진지하고 탁월한 사유로 풀어나간다.

여느 작가들처럼 신춘문예로 등단을 한 것도, 그동안 꾸준히 문단을 노크하며 소설을 습작해온 것도 아닌 저자가 장편 소설을 집필하는 지난한 여로에 올랐던 이유는 파리에서 공부한 철학적 테제들을 자신의 젊은 시절 자양분이었던 문학으로 풀어내기 위해서였다.



시간은 소멸해가는 동시에 흘러가는 강물처럼 삶에 깊이 파고든다. 시간만이 해낼 수 있는 실패와 좌절, 어떤 가치나 감동들. 거센 흐름으로 패인 곳에는 다시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곳은 새로이 뭔가로 채우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차 있는 곳보다는 비어 있는 곳이 더 자유로우며, 이루어진 성과보다는 어려운 열망이 더 크게 성장하게 한다는 것도 그동안 시간이 알게 한 깨달음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 그녀는 왜 그 곳에 있을까



유럽의 어느 작은 마을, 공원의 일인용 벤치에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그녀는 마흔이 넘은 한국인. 아무리 봐도 부유한 남편을 따라 외유를 즐기거나 새로이 정주할 곳을 찾기 위해 바다를 건넌, 속칭 세계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화려한 경력의 커리어우먼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인생의 안정기에 접어들어 안락함을 즐기고 있어야 할 나이에 그녀가 낯선 곳에서 홀로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런데 실상 정착이 중요한 문제였다. 결국 미래의 문제였다. 현재는 나쁘지 않았다. 기꺼이 그렇게 살 수도 있었다. 부양해야 할 가족도, 넓은 집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가능하지 않을 것도 없었다. (…) 그러나 미래는 확실한 결정만을 원했다. 어딘가에 확고하게 자신을 묶어둘 줄 아는 정착민. 불신을 해소해줄 뚜렷한 비전의 제시. 관계와 약속. 세상은 그런 것만을 요구했다. 고독한 몽상가는 필요없었다. 성실한 현재는 아무런 비전도 제시하지 않았다. ― 본문 81쪽





현재 그녀의 삶이 부유하고 있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리멸렬함과 불행의 예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한국을 떠나 그녀는 도망치듯 밤 비행기를 탔고, 유럽 땅에서 철학을 만났다.

그저 생각하는 것밖에는 몰랐던 서른 살의 늦깎이 학생에게, 철학은 치수가 잘 맞는 옷처럼 느껴졌다. 매일같이 철학자와 문학가들을 벗 삼아 도서관을 지키던 시간들, 선문답과도 같은 친구와의 대화. 그녀는 관념의 세계에 빠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은 허공에 발을 디딘 것과도 같았던 삶에 확실한 지지기반이 되어주었고 그녀는 지난 30년의 어느 때보다 생기에 넘쳤다.



▣ 하늘과 땅 사이에서 그를 만나다



어느 날, 화가 라파엘로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청년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철학도였던 그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라파엘이었다.

라파엘은 언제나 알듯 모를 듯한 화두만 남기고 사라졌다가, 그녀가 궁금해 할 때쯤이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곤 했다.



“오랜만이야. 어떻게 지냈어?” 그의 목소리를 찾아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나라 사람으로 보이는 한 친구와 막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왜 그는 항상 하늘과 땅의 중간쯤에서 보이는 거지?’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 본문 186쪽



라파엘을 만난 이후,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그를 갈망했다. 그녀는 라파엘이 던지고 간 말, 그가 건넨 시집을 표지삼아 자신의 존재와 시간의 소멸, 생의 의미를 추적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철학자들―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칸트, 헤겔을 거쳐 니체와 하이데거, 사르트르와 레비나스에 이르기까지―이 그녀의 여정에 동참한다. 이들은 소설 속에서 때로는 교수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으로 현현하며 이야기 전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뿐 아니라 주제를 다양한 방법으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 라파엘은 실제로 존재했을까



라파엘은 그녀에게 모처럼 찾아온 생의 활로였다. 그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자꾸 비껴가기만 하는 라파엘과의 만남은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며“결혼 생활이 삶을 대체로 더 풍요롭게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은근한 암시를 보내왔을 때조차 그 말이 지닌 현실적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허둥댔다.

그렇게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라파엘은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시내버스 안에서였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막 버스 옆으로 지나갔는데, 창가에서 바로 한 팔 거리였다. 게다가 버스는 서 있었고, 그의 자전거도 곧바로 신호등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내려서 그를 부를 수도 있는 거리였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휙 지나가는 그를 보며 그녀는 무언가 또 한 번 가슴속에 박히는 심정이었다. 숨도 쉴 수 없이 절망스럽고 가파른 언덕 위에서 끝없이 추락하는 그런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의 눈은, 어떤 영원의 형상과도 같은 하얀 물체 하나가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다시 한 번 본 것만 같았다. ― 본문 258쪽



하지만 생각해보면 라파엘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바로 그 열망만큼 그녀는 끊임없이 그의 시선을 피해왔던 것은 아닐까? 라파엘과 정면으로 만나 서로의 존재를 제대로 확인하고 살아 꿈틀대는 욕망을 나누는, 일상의 삶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타인과 정직하게 만난다는 일은 그 얼마나 큰 용기와 이해를 요구하는지…….



그녀는 꿈에서 깨어났다. 라파엘은 실제로 나의 현실에서 존재했던 것일까? 아니면 나의 상상과 꿈속에서만 존재했을까? 그녀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그 엽서에 이렇게 첫 마디를 시작하려고 했다. ‘네가 나의 생각을 떠난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본문 322쪽



또다시 그녀는 혼자 남았다. 그러나 라파엘이 남긴 지표들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라파엘이 건네준 시집과 《바르샤바의 회상》을 읽으며 사라진 그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바르샤바는 라파엘의 고향이며, 그가 그녀를 떠나 귀환한 환상 속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 때문에 독자들은 그들이 실재하는 인물이거나 저작일 것이라는 점을 의심치 않을 것이지만 소설 속에서 그녀의 여정에 매우 중요하며 결정적인 단서를 제시하는 《바르샤바의 회상》이나 라파엘이 건네준 시집과 시인, 철학자 얀 로스, 그녀의 지도교수들은 모두 작가의 창조물이다.



▣ 사이프러스 나무는 어디에 있을까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녀는 지금 바르샤바의 공원에 앉아 있다. 쉼 없이 소멸되는 시간 속에서, 현실적인 거의 모든 것에 느리고 서툴렀던 그녀는 아직도 사라지는 시간과 그곳에 갇힌 자신의 삶을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다.

그러나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 그녀가 사이프러스 한 그루를 보게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무책임한 낙관은 아니지만 사이프러스는 그녀 삶이 가장 생기 있게 빛나던 시절, 라파엘과 수시로 만나고 비껴가던 학교의 교정에서 보았던 나무가 아닌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수한 슬픔과 고난, 그리고 이해 불가능한 모순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존재 자체가 비극인 것은 아니다.



두려움이 삶의 모든 가능성을 닫아버렸다. 두려움,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바닥도, 끝도 없는 곳에서 그녀는 갑자기 모든 고통과 두려움이 사라지는 걸 보았다. (…) 너무나 풍부한 자유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자유는 그녀가 자신을 선택하도록 이제까지 기다려왔다는 듯이 자신 있게 문을 두드렸다. 비로소 문이 열리며 천천히 방향을 잡는 빛 속에서 사물과 정신의 축적물이 하나씩 제 모습을 드러내며 움직였다. 그녀는 처음 보는 그것들을 놀라며 바라보았다. - 본문 330쪽



소설 《소멸하는 순간》은 시간의 소멸을 ‘사라짐’이 아니라 성숙과 발효의 과정으로 그려낸다. 모든 소멸해가는 시간들은 우리 삶의 증언자이며, 이미 소멸해간 시간을 끌어안고 우리는 남은 생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지난 1990년대 초, 파리로 날아가 그곳에서 10년 가까이 서양 현대철학을 공부해온 작가 박유하는 2백자 원고지 1,500매가 넘는 자신의 첫 소설에서 이처럼 오래되고 무거운 주제들을 빼어난 사유와 차분한 문장으로 잘 녹여내고 있다.

꼭 열악한 문학 시장 탓을 하지 않더라도 독자들에게 쉽사리 환영받기 힘든 철학소설을 쓰게 된 것은, 우리의 삶에 육중한 무게로 자리하고 있는 ‘시간’과 ‘존재’에 대한 저자의 성찰을 철학과 문학의 경계가 사라진 글쓰기로 승화시키기 위해서였다.

다소 모호하고 철학적인 표현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소설 속‘그녀’의 시간들이 소멸해가는 과정을 찬찬히 지켜볼 수 있다면, 정말이지 오랜만에‘시간’과 ‘인생’에 관한 사유의 조각들이 격조 있는 한 폭의 그림으로 짜 맞춰지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삶처럼 시간은 무효화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잊혀질 수 없는 것이다. 어느 한 부분의 시간을 삭제해 쓰레기통에 간단히 던져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따금 망각될 수는 있으나 소멸되지는 않는다. 나는 나의 나머지 생을 이 기억과 함께 살아야 할 것이다. ― 본문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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