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학자이다

나는 과학자이다

  • 자 :대한화학회
  • 출판사 :양문출판
  • 출판년 :2013-03-09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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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에 도전한 최초의 한국인 과학자



이태규(李泰奎).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던 그는 끊임없는 호기심과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학문의 길을 닦아 세계적인 이론학자로 발돋움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상에 도전한 과학자이다.



1902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난 이태규 박사는 식민지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일본 교토제국대학의 정교수가 된 실력파였다. 일본이라는 한계조차 뛰어넘고자 한 그는 1939년 헨리 아이링, 알버트 아인슈타인, 테일러, 헤르만 바일 등 세계적인 석학들이 있는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초청과학자로서 헨리 아이링과 함께 양자역학을 도입한 양자화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조국으로 돌아와 서울대학교 창립 초기의 무질서를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대한화학회를 창립하여 우리나라 과학 발전의 초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8년 2년 예정으로 유타대학 교환교수로 떠났다가 결국 25년 동안이나 미국에 머물게 된 그는 유타대학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 화학계를 이끌 탁월한 제자들을 배출하였고,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알려진 비뉴턴 유동에 대한 논문을 비롯하여 촉매 반응 및 반응속도론, 액체 이론, 유변학(리올로지) 등 이론화학의 여러 분야에 걸친 연구업적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90 평생 중 50여 년을 외국에서 살았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오랜 미국 생활에서도 국적을 버리지 않은 채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구하던 이태규 박사는 마침내 1973년 한국과학원 교수로 부임하여 1992년 작고할 때까지 KAIST 종신 석좌교수를 역임하였다. 죽는 날까지 조국을 위하여 과학자로서 할 일을 찾았던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KAIST의 우수한 젊은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겼다. 이러한 애국심과 뛰어난 과학적 성과로 국가의 명예를 드높인 업적이 인정되어 이태규 박사는 과학자로는 유일하게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학자도 교수도 과학자도 기업인도 방송인도 자신의 입지가 어느 정도 강화되면 다른 세계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결국 열정을 다해 성취한 학자들의 학문조차 사회와 국가에 온전히 공헌하지 못한 채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온 삶을 다해 과학에 투신하고 그러한 삶을 통해 진정 학문하는 이의 행복과 보람과 가치를 보여준 이태규 박사를 기억하는 일은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마지막까지도 과학을 놓지 않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이태규 박사는 식민지 국민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차단한 일제의 정책을 무릅쓰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무서운 집념과 조선인의 자존심으로 일본 학생들을 뛰어넘는 능력을 보임으로써 마침내 교토제국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당시 일제는 식민지 출신에게 일본인을 가르치게 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었으나 '학문에 국경이 어디 있는가'를 물으며 그의 능력에 끝없는 신뢰를 보인 지도교수 덕분에 고된 차별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절감한 이태규 박사는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학문을 성취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그때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지 못해 난감한 상황에 처하자 기업을 하던 동포들이 그에게 돈을 건네며 “이 돈은 조국이 그대에게 주는 돈이라 생각하시오. 우리 민족이 갱생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당신 같은 인재를 길러야 할 것이오. 반드시 뒷날 성공하여 조국에게 갚으시오.”라며 당부하였다. 결국 그는 오랜 미국 생활에서도 그들의 뜻을 잊지 않고 한국 화학계를 이끌 탁월한 후학들을 배출했다.



강의 파행과 학생들의 수업권을 침해하면서까지 정치판에 양다리를 걸치는 오늘날의 교육 풍토에서 이태규 박사는 다시 한 번 조명되어야 할 훌륭한 모델이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한 우물을 판 과학자였고, 제자들을 깊이 사랑하는 스승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깊이 새긴 '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는 가훈을 'Everlasting Effort'(끊임없는 노력)라고 번역하여 ‘Keen Observation'(예리한 관찰)과 함께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과학자로서 개인의 성취는 물론이고 국가를 위해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이 땅에 현대과학의 기틀을 마련하다



이태규 박사는 온 삶을 통해 우리나라 과학계에 한 알의 밀씨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조국의 분단 상황을 겪는 혼돈의 세월에도 그는 한국인의 자존심을 잊지 않고 조국을 위해 과학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였다. 그는 해방 이후 혼란 속에서 대한화학회를 창설하여 우리나라 화학 분야의 정착에 큰 기여를 하였고, 미국 유타대학에서는 심혈을 기울여 한국인 제자들을 배출함으로써 오늘날 우리 화학계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최성학, 양강, 한상준, 장세헌, 김각중, 전무식, 백운기 박사 등 한국 화학계를 이끌고 있는 탁월한 학자들이 그의 직간접적인 지도를 받았고, 화학분야 뿐만 아니라 물리학의 권숙일 박사, 이용태 박사 등도 그의 영향과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였다.



삼보컴퓨터 이용태 전회장은 “학문에 임하는 선생님의 태도는 성직자나 다름없었다. 유타대학에 있으면서 많은 한국학생들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미국 신문에 유타대학 화학과에서는 한국어로 세미나를 한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이렇듯 오랜 미국 생활에도 조국을 위해 후학을 키우는 데 최선을 다한 이태규 박사는 1973년 한국과학원 명예교수로 귀국한 이후에도, 죽는 날까지 학교에 나가 연구 활동을 계속하며 학생들의 학위 연구를 직접 지도하였다.





리-아이링 이론과 이태규의 과학



일본인이나 교토제국대학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뛰어난 학자였고 과학자였던 이태규 박사는 화학자를 꿈꾸던 최초의 순간부터 매료되었던 촉매작용을 열정적으로 연구하면서 자신의 분야를 확대해 나가 반응속도론, 유변학, 액체이론 등의 분야에서 여러 우수한 연구 업적을 발표함으로써 탁월한 이론화학자로 발돋움하였다. 특히 1950년대 유타대학에서 양자화학의 권위자인 헨리 아이링과 공동으로 수행한 유변학 연구는 그의 대표적 성과이자 죽을 때까지의 핵심적인 연구 주제가 되었다.



20세기 들어 성립된 최신 분야인 유변학 중에서도 이론적 취급이 매우 어려운 비뉴턴 유동에 대해 연구한 이태규 박사는 6ㆍ25전쟁 중이던 1950년대 조국의 상황과 가족에 대한 근심을 이기기 위해 연구에 몰두하여 1955년 아이링과 함께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하였다. 그는 유동상태에 있는 물질의 비뉴턴성 흐름을 연구한 이 이론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또한 이 이론으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계속 이 일반 공식을 이용하여 여러 물질의 유변학적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한 이태규 박사는 1965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추천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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